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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공간·권력·통제와 인간성의 균열

by red-sura 2025. 7. 25.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사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이후의 생존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권력 구조와 공간 통제, 그리고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정교하게 추적하는 영화다. 영화는 도시의 잔해 속 단 하나 남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인간 본성의 양면성과 불균형한 권력의 생성 과정을 전개하며, 재난이 남긴 것은 폐허가 아니라 윤리의 붕괴임을 조용히 드러낸다. 이번 리뷰에서는 공간의 상징성, 권력의 작동 방식, 통제 체계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다시 읽어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공간은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요 배경인 황궁 아파트는 단순한 생존처가 아니다. 이 공간은 질서와 통제, 배제와 수용의 경계선이 끊임없이 재편되는 구조적 장치다. 처음에는 도시의 잔해 속 살아남은 마지막 공간처럼 묘사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내부는 점점 더 배타적이고 밀폐된 규칙을 따르게 된다. 출입은 통제되고, 식량은 제한되며, 구성원은 선택된다. 영화는 이를 통해 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공간의 안전성’이 얼마나 빠르게 권력화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아파트라는 익숙한 공간이 갑작스레 통제 구역으로 전환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대신, 누구도 악인이 아니었던 인물들이 ‘정상적인 선택’이라는 이름 아래 점차 타인을 배제하고, 내부를 강화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데 몰입해가는 과정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말하는 ‘공간’은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의 플랫폼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공간은 정말 중립적인가?’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불편한 답을, 무너진 도시와 생존 아파트의 풍경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재난보다 훨씬 냉혹하다.

일상의 구조 속에서 성장하는 통제의 기술

본격적인 이야기는 영탁(이병헌 분)이 공동체 내에서 일종의 지도자적 역할을 맡기 시작하면서 펼쳐진다. 그는 처음엔 모두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입장이었으나, 곧 규칙을 만들고 판단을 내리는 위치로 이행한다. 중요한 건 이 권력이 강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 스스로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구조라는 점이다. 영화는 바로 이 점에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재난 속에서 필요한 권력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영탁의 명령은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결정처럼 포장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규범’으로 작동한다. 아파트 내부는 점점 더 위계적인 구조로 변하고, 외부인은 완전히 배제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은 단순한 생존 분쟁이 아니라, 권력과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로 확장된다. 주민들은 영탁을 따르며 안정을 얻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판단 능력을 상실해간다. 영화는 이러한 심리를 강하게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무력한 동조가 만들어내는 폭력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권력은 선언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필요와 동조, 침묵 속에서 자라난다. 이 영화는 그 권력의 뿌리가 얼마나 일상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감정이 사라지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선택과 침묵 사이, 인간성의 무너지는 지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통제된 공간과 권력 구조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묻는 영화다.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사람들은 다시 구조를 만들고, 규칙을 세우며, 안전을 확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을 배제하고, 정당하지 않은 선택을 합리화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 윤리적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조용히 포착한다.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바뀔 수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바로 그 전환의 순간을 보여주며, 관객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이 영화는 재난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일상의 구조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통제되고, 또 타인을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편한 성찰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은 더 이상 큰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 담긴 감정은 영화 전체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아파트, 거리, 공동체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 질문을 품은 채, 관객에게 판단을 유보한 채로 화면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