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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기억과 상실이 만든 윤리의 무게

by red-sura 2025. 7. 26.

영화 리멤버 포스터 사진

‘리멤버’는 복수를 소재로 하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훨씬 깊고 복합적인 주제들이 얽혀 있다. 이 영화는 기억의 신뢰성과 상실의 후폭풍, 그리고 인간이 저지르는 행동의 윤리적 무게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주인공이 쫓는 것은 과거의 원수가 아니라, 기억과 책임, 그리고 사라져가는 정체성이다. 본 리뷰에서는 ‘리멤버’가 어떻게 감정보다 윤리와 질문에 집중하는지, 그리고 기존 복수극과 무엇이 다른지를 살펴본다.

리멤버, 불완전한 기억이 만든 복수의 궤도

사람은 기억을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 기억이 완전한 진실일까? 영화 ‘리멤버’는 이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필주는 가족을 잃은 과거를 떠올리며, 그 기억을 근거로 복수를 감행한다. 문제는 그의 기억이 치매로 인해 점점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를 다시 떠올리며 ‘누가 무엇을 했는가’를 되짚지만, 그 확신은 감정과 결합되어 점점 더 모호해진다. 관객은 점차 그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혹은 누군가의 잘못된 기억을 근거로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영화의 강점은 바로 이 불확실성의 정서를 매우 섬세하게 설계했다는 점이다. 장면마다 주인공의 판단이 얼마나 감정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의 감정을 이해하게 만든다. 관객은 이 딜레마에 빠진 인물을 단죄할 수도, 전적으로 지지할 수도 없다. 기억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진실은 기억보다 덜 선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균열이 영화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필주의 선택은 ‘내가 옳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라는 감정적 추론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이 불완전한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면서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간적 약점으로 설명한다. 결국 ‘리멤버’는 복수의 감정보다, 복수의 근거가 된 기억 자체를 문제 삼으며, 우리가 얼마나 흔들리는 기반 위에서 판단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상실과 정체성의 붕괴, 되찾을 수 없는 감정

‘리멤버’는 복수가 중심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깊은 곳에는 상실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은 가족을 잃었고, 기억을 잃어가며, 정체성조차 흔들리고 있다. 그는 단순히 과거의 복수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자신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 ‘상태’를 보여준다.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이야기다. 상실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다. 화면은 조용하고, 인물은 말을 아낀다. 심지어 폭력조차 침묵 속에 이루어진다. 이성민의 연기는 이 ‘감정 없는 감정’을 매우 세밀하게 구현한다. 그는 분노하지 않고, 고통을 드러내지 않으며, 다만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행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감정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된다. 큰 외침 없이, 가만히 스며드는 상실의 감정이 극장을 나서고도 오래 남는다. 상실의 감정은 필주의 선택을 부추기지만, 그 감정은 해결되지 않는다. 복수를 완성한 순간에도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정체성을 잃고 만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복수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되는 심리적 고통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상실이 만든 복수, 복수가 낳은 공허함, 이 연결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다. ‘당신은 무엇을 잃었고,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복수의 끝에서 남는 윤리적 질문과 책임

‘리멤버’의 마지막은 액션이 아닌 질문으로 남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복수란 누구를 위한 행위인가? 영화는 이 물음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복수를 감정의 해소로 소비하지 않고, 그 행위의 윤리성과 책임을 끝까지 따라간다. 주인공의 행동은 정당해 보이지만, 동시에 불완전한 기억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영화는 그 모순을 비판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기존 복수극에서 흔히 등장하는 ‘통쾌한 전환’이나 ‘악의 처단’ 같은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의 결과가 감정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도리어 윤리적 책임을 남기는 식으로 구성된다. 이 지점에서 ‘리멤버’는 윤리극에 가까워진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내가 행한 일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묻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단지 주인공만이 아닌 관객 모두에게 향한다. 기억은 흔들리고, 감정은 왜곡된다. 이 틈 사이에서 인간은 판단하고 행동한다. ‘리멤버’는 그 판단의 취약함을 냉정하게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공감을 놓지 않는다. 이 영화가 진정 가치 있는 이유는, 정의를 외치지 않으면서도 책임의 무게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복수를 넘어선 이야기, 인간의 선택에 남는 윤리적 그림자 — 그것이 ‘리멤버’가 남긴 질문이며, 이 영화가 오래 기억되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