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2015)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영웅 서사를 넘어 ‘정체성의 이중성’과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주제를 담아냅니다.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 작품은 쌍둥이 자매라는 설정과 조국, 가족, 배신, 협력의 복잡한 얽힘 속에서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모호한 일인지를 관객에게 되묻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암살’을 중심으로, 진짜와 가짜의 경계,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되는 역사적 기억에 대해 분석합니다.
암살이 던지는 정체성의 이중성
‘암살’은 극단적인 이중 구조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안옥윤과 카와구치 유키는 쌍둥이지만, 서로 다른 정체성과 역사를 갖습니다. 한 사람은 독립운동가로, 다른 이는 일제에 협력하는 인물로 그려지며, 영화는 이 둘 사이의 대비를 통해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상황과 기억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관객은 초반부부터 ‘누가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떠안고 영화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단순히 외모나 태생이 아닌,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에 따라 규정됩니다. 이 구조는 단순한 반전이나 서스펜스 장치가 아니라, 역사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개인의 정체가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말해줍니다. 특히 영화는 ‘기억’의 작용을 은밀하게 삽입합니다. 인물들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잘못 기억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조국을 위한 결단인지, 생존을 위한 변절인지 모호한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정체성은 흔들리고 인물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이런 서사의 방식은, ‘암살’이 단지 영웅담을 재현하는 작품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오히려 영화는 관객에게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임을, 그리고 그 구성이 때론 극단적으로 왜곡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우리가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누구를 기억하고, 누구를 지우는가에 따라 역사적 정체성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와 가짜, 배신과 충성의 경계
‘암살’의 중심 갈등은 단순한 독립운동과 친일파 간의 충돌을 넘어섭니다. 영화는 각 인물들이 처한 위치와 입장에 따라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가차 없이 흐려놓습니다. 예를 들어 염석진은 독립군 내부에 있으면서도, 실상은 일제에 협력하는 이중간첩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생존을 위해 선택했음을 내세우지만, 그 선택은 수많은 동료의 희생을 낳습니다. 반대로 하와이 피스톨은 냉정한 용병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진심을 선택하며 ‘진짜’가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영화는 ‘진짜’와 ‘가짜’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해체하고, 그 사이의 회색 지대에 인물들을 위치시킵니다. 그들은 늘 자신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며, 그 믿음은 상황에 따라 ‘배신’이 되기도 하고 ‘충성’이 되기도 합니다. 관객은 그 판단을 단정적으로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계속해서 ‘사실’을 뒤틀고, 인물의 이면을 드러내며, 누가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바꿔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암살’은 관객에게 도덕적 흑백논리를 거부하도록 유도하며, 현실 세계의 정치적·역사적 판단이 얼마나 모호하고 복잡한지를 전달합니다. 또한 극 중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암살’이라는 행위 자체도 문제적입니다. ‘암살’은 정의의 도구일까요, 아니면 또 하나의 폭력일까요? 영화는 이 질문을 직접 던지지 않지만, 여러 장면을 통해 그것이 단지 하나의 ‘옳은 행동’으로 고정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누가, 왜, 누구를 위해 죽이는가’에 따라 모든 판단은 다시 쓰여야 합니다.
기억의 재구성, 역사적 서사의 다층성
영화의 말미에서 안옥윤은 자신의 정체를 받아들이고, 혼란스러운 과거의 기억 위에 새로운 선택을 합니다. 그녀는 이선생을 암살함으로써 단순한 임무 완수자가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합니다. 즉,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암살’은 관객에게 단순한 역사 재현이 아니라, ‘기억의 서사적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누군가는 잊히고, 누군가는 영웅이 되며, 또 누군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 모든 요소가 우연과 필요, 선택과 강요 속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잊지 않게 합니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영웅들, 친일파의 배신, 그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그들은 모두 ‘이야기’ 속에서 평가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대와 정치적 의도에 따라 계속 쓰이고 다시 지워지기도 합니다. ‘암살’은 그런 의미에서 ‘기억’ 자체에 대한 영화입니다. 누구의 이야기가 남고, 누구의 진실이 묻히는가. 그 선택의 무게는 단지 개인이 아닌, 시대 전체의 몫입니다. 그리고 관객은 그 시대의 일부로서, 매 순간 그 기억을 다시 구성해야 할 책임을 가집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울림 있는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를 남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객의 머릿속에 질문을 심고, 그 질문이 영화 밖에서도 지속되도록 설계된 ‘기억의 기획’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