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은 단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한 범죄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한국형 스릴러의 토대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장르 문법을 뛰어넘어 시대적 리얼리즘과 인간 심리를 정교하게 엮어낸 작품입니다. 특히 로컬리티에 기반한 연출, 인물의 심리적 붕괴, 그리고 끝내 해결되지 않는 서사 구조는 이후 한국 영화에서 범죄 장르를 대하는 시선과 방향성을 바꿔놓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살인의 추억’이 어떻게 스릴러의 규범을 새롭게 구성했는지, 인물은 어떤 내면적 한계에 부딪혔는지, 그리고 미완의 결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탐구합니다.
살인의 추억이 보여준 로컬 스릴러의 감각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한국적 정서와 지역성에 깊게 뿌리내린 범죄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1980년대 말 경기도 화성 일대라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재구성을 통해 장르 영화의 외형을 가지되,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짙게 그려냅니다. 로컬리티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이유는, 단지 배경의 특이성 때문이 아니라 인물의 태도, 수사 방식, 공동체의 반응이 모두 그 지역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형사 박두만은 현장 보존 개념도 없고, 증거보다 ‘촉’에 의존하는 인물입니다. 반면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 서태윤은 이성과 논리를 중시합니다. 이 둘의 충돌은 단지 성격 차이가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의 수사 현실과 제도적 미비, 지역 간 문화 격차를 상징합니다. 또한 영화는 198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성과도 긴밀하게 맞물립니다. 경찰의 권위주의, 여성 피해자에 대한 무관심, 비인간적인 취조 방식은 모두 당시 사회 구조의 일면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범죄 영화인 동시에 사회적 진단의 성격을 지니며, 이는 스릴러 장르에서 보기 드문 접근입니다. 스릴러는 통상적으로 범인을 좁혀가며 해답을 향해 나아가는 구조를 택합니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그 기대를 끊임없이 배반합니다. 의심스러운 용의자가 나올 때마다 증거는 모호하고, 수사는 좌절되며, 확신은 허물어집니다. 이러한 반복은 장르적 쾌감보다는 점진적인 불안을 쌓아 올리고, 관객은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현실 속에 방치됩니다. 이 긴장감이 바로 한국형 스릴러의 핵심 정서로 자리 잡은 ‘무력한 공권력’과 ‘실체 없는 공포’의 정서를 형성합니다. ‘살인의 추억’은 그래서 단지 한국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로컬리티와 시대성을 바탕으로 한국형 스릴러의 정체성을 형성한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스릴러 장르 속 인물의 심리적 한계
‘살인의 추억’의 중심에는 형사 박두만과 서태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건의 해답을 향해 달려가지만, 동시에 각자의 한계에 부딪히며 무너져 갑니다. 박두만은 처음에는 ‘범인의 얼굴을 보면 안다’는 촉의 신봉자입니다. 하지만 사건이 장기화되고 용의자가 계속해서 놓이면서 그의 확신은 점점 흔들립니다. 그의 감정은 분노와 절망, 좌절과 무기력 사이를 오가며, 마침내 그를 둘러싼 세계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서태윤은 이성과 논리, 증거 기반 수사를 믿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박두만과 마찬가지로 사건의 미궁 속에서 심리적으로 붕괴되어 갑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그가 확신한 범인에게 총구를 겨누지만 끝내 쏘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순간이며, 동시에 관객이 목도하는 형사로서의 무력함입니다. 이처럼 영화는 두 인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지만, 결국 같은 지점 — ‘알 수 없음’ — 에 도달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의 서사적 굴곡이 아니라, 봉준호 감독이 말하고자 한 ‘진실의 불확실성’, ‘시스템의 무능함’을 인물의 심리를 통해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범인을 좁혀가는 데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형사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 범인인지보다, 형사들이 왜 이렇게까지 변화했는지를 더 깊이 궁금해하게 됩니다. 이는 기존 스릴러 장르와는 다른 관점입니다. 스릴러는 통상 사건의 해결로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살인의 추억’은 해결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보여주며 감정의 무게를 극대화합니다. 이런 심리적 구조는 이후 ‘추격자’, ‘마더’, ‘악마를 보았다’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스릴러의 주요 정서로 자리 잡습니다. 결국 ‘살인의 추억’은 인물 중심 스릴러의 전범이 되며, 그 내면의 균열이 영화의 주제와 직접 연결되는 방식을 정착시켰습니다.
미해결 구조, 질문만 남긴 서사의 힘
‘살인의 추억’이 후대에 길이 남는 이유는, 그 결말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스릴러는 범인을 찾아내거나, 최소한 사건에 일정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수사를 중단하고, 시간은 흘렀으며, 인물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일상 속에 남은 공백은 ‘범인이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왜 잡히지 않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무기력했는가’라는 집단적 회한입니다. 이 미완의 구조는 매우 한국적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사건, 폐쇄적인 구조, 책임을 떠넘기는 공권력, 잊혀지는 피해자들 — 영화는 이 현실을 꾸며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사회 고발 영화이기도 하며, 관객의 도덕 감각과 집단 기억에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진가를 증명합니다. 박두만이 어린아이의 말에 흔들려 다시 과거의 현장을 응시하는 그 장면은, 단지 추억이 아닌 트라우마, 죄책감, 그리고 부채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박두만의 클로즈업으로 전환되며, 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그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이 질문은 단지 영화 속 질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는가, 얼마나 쉽게 책임에서 빠져나가는가, 그리고 누군가는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외면하는가. ‘살인의 추억’은 미해결의 상태로 영화적 결론을 내림으로써, 관객 각자에게 해석과 감정을 남깁니다. 이 여운은 단지 감동이 아니라, 불편함이며, 동시에 사회적 숙제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영화는 한국형 스릴러의 전범일 뿐 아니라, 한국 영화사의 한 전환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