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 2002)’는 단순한 첩보 액션 장르로 분류되지만, 그 이면에는 기억 상실을 통해 자아를 재구성하는 한 인간의 주체성 회복 서사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주인공 제이슨 본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양한 폭력적 기술과 본능적 반응을 드러내며, 오히려 정체성의 실체가 무엇인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글에서는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인식하고 행동하는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 작품이 보여주는 주체성과 정체성의 해체 및 재구성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본 아이덴티티가 말하는 주체성의 혼란과 시작점
제이슨 본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지중해 한복판에서 구출됩니다. 그는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바다에 떠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는 킬러의 기술, 생존을 위한 반사신경, 다양한 언어와 전략을 활용하는 능력이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때 영화는 관객에게 한 가지 의문을 남깁니다. “기억이 없는데도 남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 영화에서 정체성은 과거의 이력이나 이념에 의해 구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현재적 사실들입니다. 그는 공격을 피하고, 살해를 막고, 위협 앞에서 반격합니다. 이 모든 것은 기억이 아니라 본능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정체성이란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는가’로도 규정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영화는 제시합니다. 또한 영화는 끊임없이 본을 쫓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그 내부의 비밀 작전 조직을 등장시켜, 본인의 정체성이 외부 권력에 의해 고의적으로 지워지고 조작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개인의 자아가 국가 권력과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설계되는지를 암시합니다. 본의 과거는 단지 그의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적 아래 의도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본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게 되는 순간에도, 그 정체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 과거를 부정하고, 지금의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를 스스로 선택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억을 되찾는 여정이 아닌, 기억을 거부하고 새로운 주체로 재구성되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기억이 아닌 선택이 만드는 정체성
제이슨 본의 여정은 자신이 누군지 찾는 것이 목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는 과연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그는 자신이 CIA의 비밀 킬러였음을 알게 되고, 수많은 암살과 작전이 자신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과거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억이 되살아났음에도,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과거의 사실이 아닌, 현재의 선택이 인간을 규정한다는 철학적 입장을 따릅니다. 제이슨 본은 자신을 암살자로 만든 CIA의 명령 체계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정립합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기억의 회복’이 아니라, ‘기억을 넘어선 재정의’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정체성의 구성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회적 구조와 국가 시스템은 인간을 하나의 기능으로 정의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본은 이러한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도덕과 감정, 경험을 기준으로 자신을 새롭게 규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체성은 외부의 규정이 아닌, 내면의 선택을 통해 탄생하는 것임을 영화는 강하게 주장합니다. 한편, 본이 마리와 함께 도주하며 보여주는 감정적 관계는, 그가 점차 도구적 인간에서 감정적 인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마리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본이 감정과 관계를 통해 인간으로 회복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영화는 스파이 액션이라는 장르적 외피 속에 ‘주체성의 형성과 회복’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이식하는 데 성공합니다.
현대 스파이 서사의 전환, 인간으로 돌아가기
‘본 아이덴티티’는 액션과 첩보물의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기존 스파이 영화의 전형을 뒤흔듭니다. 이전까지의 첩보물들은 스파이를 국가의 충직한 도구로 묘사하고, 그들의 충성과 전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자기 존재를 회복하기 위해 싸우며, 그 과정에서 수동적인 존재에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진화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아닌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인물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살아가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SNS, 데이터, 감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통해 규정되고 있지만, 결국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선택’ 일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시사합니다. 또한 영화는 권력과 정보에 대한 경계심을 암시합니다. 본의 기억은 누군가에 의해 삭제되고 조작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극적 장치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개인의 정보와 정체성이 쉽게 통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결국 본은 과거의 자신이 아닌,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그것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인간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습니다. ‘본 아이덴티티’는 그래서 단순한 스파이 액션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기억을 잃은 뒤에도 어떻게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스템과의 충돌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 액션 서사입니다. 기억이 곧 정체성이 아닌, 선택이 정체성이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영화는 조용히 화면을 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