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은 단지 과거 조선시대의 궁중 암투를 재현하는 사극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타고난 얼굴, 즉 운명이라는 틀 속에 어떤 권력을 향한 의지와 선택을 더해가는지를 탐구하는 심리극에 가깝습니다. 관상가라는 설정은 인물이 아닌 사회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읽고 판단하는지를 상징하며, 결국 얼굴을 본다는 행위는 인간의 내면이 아닌 시대의 흐름과 권력의 성질을 들여다보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관상’이 제시하는 운명과 권력의 함수, 그리고 인간의 선택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관상이 말하는 운명의 구조와 권력의 얼굴
‘관상’은 조선 초기, 왕권이 위태롭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내경은 뛰어난 관상술로 이름난 인물로, 사람의 얼굴을 통해 그 운명을 읽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관상이라는 기술이 단지 운명을 예측하는 도구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점을 빠르게 드러냅니다. 그것은 곧 권력에 의해 이용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도구’입니다. 관상은 얼굴을 읽는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더 나아가 ‘세상을 읽는 방식’으로 확장됩니다. 누가 왕이 될 얼굴인가, 누가 역모를 꾀할 상인가—이러한 판단은 개인의 미래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흐름을 결정짓는 요소가 됩니다. 권력은 이러한 예측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며, 이는 내경의 판단을 더욱 무겁고 복잡하게 만듭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운명’이라는 개념이 정말 존재하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관상가는 얼굴을 보고 미래를 말하지만, 결국 그것이 사람의 선택과 행동을 유도하고, 결과적으로 운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즉, 운명은 예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주제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특히 수양대군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권력의 얼굴’을 구체화시킵니다. 그는 말로는 덕을 이야기하지만, 얼굴에는 살기가 흐르고, 눈빛은 끝없는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대조적인 모습은 ‘권력의 본질’이 얼마나 인간의 외양과 내면, 선택과 구조 사이에서 혼란스럽게 얽혀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영화의 ‘관상’은 인간 개별의 성격을 읽는 방식이 아니라, 시대가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강제하는지를 읽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경은 점점 자신의 기술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데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며, 관상술의 본질을 되묻게 됩니다.
운명이라는 각본 속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영화의 주인공 내경은 처음엔 자신의 능력을 자부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그의 말은 마치 신의 계시처럼 받아들여지고, 실제로도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하지만 조정에 발탁되어 정치적 영역에 진입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판단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의 무게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본 ‘얼굴’의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왕이 될 상을 가진 자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 아니면 그 자가 가져올 혼란을 막기 위해 역행해야 하는가. 이때부터 내경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 직접 끌려들어 가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곧 ‘운명은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선택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수양대군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그 안에 담긴 냉혹함과 권력욕을 간파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막을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 위험을 경고하지만, 주변의 권력자들은 이미 수양을 지지하고 있으며, 민심도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이 상황에서 내경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점점 좁아지고, 결국 그는 권력의 폭력성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의 판단은 언제나 옳았지만, 그것이 현실을 바꾸는 데는 실패합니다. 이는 곧 운명을 아는 것이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영화는 이 비극을 통해, 인간이 아무리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도, 결국 구조와 권력의 압력 아래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또한 내경의 아들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직접 행동하지만, 그의 행동은 거대한 권력의 물결에 의해 씻겨 나갑니다. 이 장면은 개인의 정의감이나 용기가 역사적 구조를 돌파하기에는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운명은 얼굴에 쓰인 것이 아니라, 권력의 의지에 의해 다시 씌워지는 것이라는 영화의 통찰이 여기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선택의 자유,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가
‘관상’은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때로는 오히려 파멸을 앞당기는 것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강조합니다. 내경은 자신의 능력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음을 인지한 뒤에도, 끝까지 옳은 길을 선택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고, 영화는 이 지점에서 운명이라는 틀 안에서의 자유의지를 되묻습니다. 우리는 흔히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구조적 권력과 역사적 흐름 안에서는 선택이 이미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내경은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실현할 권력도, 수단도 갖지 못한 인물입니다. 결국 그는 ‘아는 자’로서 고통받고, 그 고통 속에서 인간성을 지키려다 모든 것을 잃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비극 속에서도 미묘한 희망의 여지를 남깁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경이 아들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모습은, 비록 역사는 바뀌지 않았지만, 최소한 누군가는 진실을 알았고, 그것을 지키고자 했다는 흔적을 남긴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후대에게 또 다른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이라면 그 얼굴을 보고 무엇을 선택했겠는가?” ‘관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철학적 탐구입니다. 외면을 본다는 것은 내면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규정하고, 또 그 규정 안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되짚는 작업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진짜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는 조용히 묻습니다. “그 얼굴을 당신은 진짜 믿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