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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믿음과 불신의 심리와 종교적 혼란

by red-sura 2025. 8. 3.

영화 곡성 포스터 사진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2016)’은 단순한 공포 영화가 아닙니다. 초자연적 사건과 범죄 스릴러의 요소를 혼합한 이 작품은, 믿음과 불신, 구원과 저주, 선과 악 사이에서 관객을 끊임없이 흔드는 종교 심리극으로 읽혀야 합니다. 특히 영화는 명확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열린 결말과 모호한 인물 설정을 통해, 우리가 믿고 싶은 대상에 스스로 얼마나 의존하며, 동시에 쉽게 배반당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는 ‘곡성’이 제시하는 종교적 혼란과 심리적 불안의 구조를 중심으로 분석해 봅니다.

 

곡성이 건드리는 믿음과 불신의 감정 심리

‘곡성’은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 원인불명의 연쇄 살인과 광기 어린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경찰 종구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사건의 깊은 혼란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관객은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범죄를 분석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에 공감하게 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종구의 판단은 감정과 공포, 그리고 불안에 의해 점차 왜곡됩니다. 이 영화가 탁월한 이유는, 누가 악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누가 믿을 만한 존재인지를 관객에게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인 외지인, 무속인 일광, 천사로 보이는 여성, 그리고 종구 자신까지 — 모든 인물은 신뢰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며, 관객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시험합니다. 특히 무속 장면이나 귀신 들린 마을 사람들의 묘사는 공포 연출을 넘어, 관객 스스로의 믿음 체계를 건드리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이 옳은지를 끊임없이 추측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믿는 자’가 아니라 ‘의심하는 자’로 전환됩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매우 한국적인 민속 종교, 기독교적 상징, 불교적 윤회 개념까지 혼합해, 단일한 신념체계로는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종교심리를 구성합니다. 종구는 딸을 구하고자 하는 절박함 속에서 무속인에게 의존하고, 여성의 말을 신뢰하며, 동시에 외지인을 폭력적으로 몰아갑니다. 이 모든 행동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믿음은 언제나 잘못된 방향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영화는 ‘믿는다는 것’의 심리적 기반 자체가 얼마나 취약하고, 불안한 감정 위에 세워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믿음은 구원인가, 파멸인가

‘곡성’의 핵심 갈등은 신념과 의심의 경계에서 발생합니다. 종구는 처음에는 과학적, 논리적 접근을 시도하지만, 자신의 딸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가 의지하던 모든 이성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는 무속인의 굿에 전 재산을 걸고, 여성의 말 한마디에 살인을 감행할 만큼 급속히 불안정해집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캐릭터의 심리 묘사를 넘어, 영화 전체의 정서 구조를 구성합니다. ‘곡성’은 믿음이 어떻게 공포에 의해 조작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심리적 방어이기도 합니다. 종구는 누구도 믿지 않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반드시 믿고 싶어 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파멸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또한 영화는 믿음의 외형이 반드시 선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무속인은 소리 지르고 춤을 추며 격렬하게 구마 의식을 진행하지만, 그 결과는 파괴적이고, 오히려 악을 강화시키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천사의 형상을 한 여인은 종구에게 ‘귀신이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그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관객은 그 말조차 진실인지 끝까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곡성’은 믿음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인간의 불안 위에 세워졌을 때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오용될 수 있는지를 끈질기게 묻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비판이 아니라, 현대인이 감정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의 기준을 어떻게 상실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은유이기도 합니다. 종구의 몰락은 결국 인간이 확신 없이 믿음을 선택할 때 벌어지는 파멸의 전형입니다.

 

진실을 향한 본능, 그러나 닿지 않는 믿음의 종착지

‘곡성’의 결말은 어떤 확정적인 진실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일본인이 진짜 악마인지, 여자가 천사인지, 무속인이 구원자인지 관객은 끝까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전통적인 종교극이나 공포영화와 완전히 다른 결을 갖습니다. ‘악을 이겼다’는 서사도, ‘진실이 드러났다’는 결론도 없습니다. 오히려 관객은 종구와 함께, 끝내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채 믿음의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이런 모호한 결말을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진실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진실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종구는 딸을 구하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으로 모든 선택을 했지만, 그가 의지한 모든 믿음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는 믿음이 언제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또한 ‘곡성’은 인간의 본능적인 확신 추구를 해체합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악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이 영화는 ‘모른다’는 감정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이 모름은 영화가 제시하는 가장 현실적인 공포이며, 동시에 가장 철학적인 메시지입니다. 진실은 항상 닿지 않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고, 믿음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 본능일 뿐이라는 점을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들려줍니다. 결국 ‘곡성’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믿음과 불신, 의심과 수용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얼마나 쉽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구원을 바랐지만 파멸을 얻은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믿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한 채, 서서히 스크린을 떠나게 됩니다.